제1차 사이온지 내각은 1906년 1월 7일부터 1908년 7월 14일까지 사이온지 긴모치가 이끌었던 일본의 내각이다. 주요 활동으로는 러일 전쟁 종결 후 재정 문제 해결, 프랑스, 러시아와의 조약 체결을 통한 외교적 입지 강화, 대한 정책 추진, 철도 국유화, 군제 폐지 시도 등이 있었다. 1908년 적기 사건으로 인한 사회주의 탄압, 내각 내 갈등 심화 등으로 인해 7월 4일 총사직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1906년 일본 - 제1차 가쓰라 내각 가쓰라 다로를 총리로 하는 제1차 가쓰라 내각은 상공업 발달, 해군 확장, 영일 동맹 체결, 러일 전쟁 승리, 한국 보호국화 등을 추진하여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했으나, 대한제국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은 한일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07년 일본 - 남대문 전투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한 시위대가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인 남대문 전투는 박승환 참령의 자결 후 시위대의 무장 봉기로 시작되었으며, 비록 진압되었지만 전국적인 항일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1907년 일본 - 한일신협약 한일신협약은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을 일본의 통제하에 두고 주권 상실을 심화시켰으며, 불평등 조약이자 식민지화의 도구로 평가받는다.
1908년 일본 - 제1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사이온지 킨모치 내각 하에서 1912년 5월 15일에 실시된 제1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러일 전쟁 이후 증세로 인한 선거권 자격 기준 완화로 유권자 수가 증가한 가운데 입헌정우회가 압승을 거두며 379명의 중의원 의원을 선출했고 투표율은 85.29%를 기록했다.
1908년 일본 - 제2차 가쓰라 내각 가쓰라 다로가 이끈 제2차 가쓰라 내각은 1908년부터 1911년까지 재정 건전화, 미국과의 관계 중시, 대한제국 병합 등의 정책을 추진한 일본 제국의 내각이다.
군부에서는 테라우치 마사타케 육군대신과 사이토 마코토 해군대신, 귀족원에서는 센게 타카토미 법무대신(목요회 소속), 홋타 마사야스 체신대신(연구회 소속)이 내각에 참여했다. 관료 출신으로는 마쓰오카 야스타케 농상무대신, 이시와타리 빈이치 및 미나미 히로시 내각관방장관, 이치키 키토쿠로 및 오카노 게이지로 내각법제국 장관이 있었다.
입헌정우회 출신 각료는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 겸 문부대신, 하라 다카시 내무대신, 마쓰다 마사히사 법무대신 겸 대장대신이었다. 귀족원에서는 센게 타카토미 법무대신(목요회 소속), 홋타 마사야스 체신대신(연구회 소속)이 있었다. 군부에서는 테라우치 마사타케 육군대신, 사이토 마코토 해군대신이 있었다. 관료 출신으로는 마쓰오카 야스타케 농상무대신, 이시와타리 빈이치와 미나미 히로시 내각서기관장, 이치키 키토쿠로와 오카노 게이지로 법제국 장관이 있었다. 그 외에 무소속으로 가토 다카아키와 하야시 타다스 외무대신, 사카타니 요시오 대장대신, 마키노 노부아키 문부대신, 야마가타 이사부로 체신대신이 있었다.
3. 내각의 주요 활동
제1차 가쓰라 내각은 의회에 명확한 여당을 가지지 않은 초연주의 체제로 발족했지만, 러일 전쟁 수행을 위해 중의원 제1당인 입헌정우회(사이온지 긴모치 총재)의 협력을 얻었다. 가쓰라 총리는 하라 다카시와 밀담을 거듭하고, 포츠머스 조약 체결 후인 1905년 12월 20일 내각 총사직을 결의, 후임으로 사이온지 총재를 추천했다. 1906년 1월 6일, 원로회의 승인을 거쳐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사이온지 총재에게 대명 강하가 내려지고, 7일에 내각이 발족했다.
조각 과정에서 가쓰라의 사전 요청에 따라 정우회에서는 하라가 내무대신, 마쓰다 마사히사가 사법대신으로 입각하는 데 그쳤다. 정책 또한 가쓰라 내각의 정책을 답습했기 때문에 "위임장 내각", "대리인 내각" 등으로 불렸다. 가쓰라 전 총리도 군사 참의관에 취임하여 내각의 고문 격으로 번벌과 정우회의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사이온지 내각은 가쓰라 전 총리의 협력 하에 정권을 운영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필두로 하는 번벌 내 반 정우회 세력과 하라 내무대신이 이끄는 정우회가 서로 세력 다툼을 벌였다. 하라 내무대신은 야마가타의 근거지인 귀족원 의원을 무너뜨리려 했고, 야마가타 원로는 중의원 제2당인 헌정 본당(오쿠마 시게노부 당수)와 접근, 대동구락부와 중앙구락부 결성을 주도했다. 군제 폐지를 둘러싸고 1906년부터 1907년에 걸쳐 갈등이 격화되었지만, 어느 쪽도 다수를 뒤집지는 못했다.[4]
1908년 1월 23일, 헌정 본당, 대동구락부, 유흥회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했으나 168 대 177로 부결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 임기 만료에 따른 제1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정우회는 선거 후 입당을 더해 과반수를 확보했다.[4]
그러나 직후인 6월 22일에 적기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주의의 침투가 드러났다. 다음 날 23일, 야마가타 원로는 천황에게 사이온지 내각의 사회주의 대응이 불충분하다고 비난했다. 도쿠다이지 사네토미 시종장(사이온지 수상의 친형)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사이온지 수상은 정권 운영에 염증을 느끼고 병을 핑계로 사의를 표명했다. 하라 내무대신, 마쓰다 법무대신은 직전 선거에서 승리한 것을 들어 위로했지만, 7월 4일 내각은 총사직했다. 후임에는 사이온지 수상이 가쓰라 전 총리를 추천했고, 제2차 가쓰라 내각이 성립되었다.[4]
1907년도에는 테라우치 마사타케 육군상과 사이토 마코토 해군상이 군사 예산 증액을 요구하여 사카타니 재무상과 대립했다. 가쓰라 전 총리가 조정하여 육군이 세 개 사단 증설을 두 개 사단으로 억제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1908년도에는 전년의 공황으로 불황에 빠졌고, 불황 대책에 대응하여 이노우에 원로는 군사비 연기로 재정 기반 강화를,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로는 증세를 주장하며 대립했다. 가쓰라 전 총리가 다시 조정에 나서 육해군 예산 연기와 술·설탕·석유 한정 증세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후 철도 예산 문제로 야마가타 이사부로 체신상과 사카타니 재무상이 사임하고, 사이온지 총리도 사표를 제출했으나 하라 내무상과 테라우치 육군상의 설득으로 각하되었다. 홋타 마사요시 귀족원 의원이 하라 내무상의 체신상 겸임 후임으로 취임했고, 마쓰다 법상이 내각 총사퇴까지 재무상을 겸임했다.
3. 2. 외교 문제
1907년 6월 10일에 프랑스-일본 협약이, 1907년 7월 30일에 러시아-일본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영일 동맹과 함께 사국 협상이 성립되었으며, 이는 '협상의 해'로 불리게 되었다.
3. 3. 대한(對韓) 정책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7월 19일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24일에 제3차 한일 협약이 체결되었다.
3. 4. 철도 국유화
하라 다카시 내무대신의 요청으로 철도 국유화가 추진되었지만, 가토 다카아키 외상이 후원한 미쓰비시 재벌(이와사키 야타로 총수가 가토의 장인)의 이익과 충돌하면서 가토 외상이 사임하였다.[4] (다만, 실제로는 건강 문제가 얽혀 있었다고 한다.[4]). 사이온지 총리는 후임으로 우치다 야스야를 추천했으나, 원로들의 반대로 하야시 타다스 전 주영 공사가 취임하였다.[4] 1906년 3월, 철도 국유화법이 성립되어 일본 철도는 협궤가 주류가 되었다.[4]
3. 5. 군제 폐지
하라 다카시 내무대신은 군부 세력 약화를 위해 군제 폐지를 추진했다. 군제는 번벌의 원로로서 반(反)정당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권력 기반이었다.[4] 1906년 3월 3일 군제 폐지 법안이 제출되어 3월 17일 중의원을 만장일치로 통과했지만, 귀족원에서 심의되지 않았다.[4] 이듬해 1907년 다시 법안이 제출되어 3월 2일에 중의원을 통과했지만, 귀족원에서는 3월 21일에 부결되었다.[4] 그러나 야마가타가 억누르고 있던 귀족원에서도 법안에 동조하는 자가 많이 나타나 야마가타에게 충격을 주었다.[4] 결국 행정 제도로서의 군이 폐지되는 것은 1921년이 되었다.[4]
3. 6. 내각관제 개정
1907년 2월 2일, 각 성 대신의 단독 부서 제도가 폐지되고 모든 칙령에 내각총리대신이 부서하게 되어 내각총리대신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1908년 6월 22일, 적기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회주의의 확산이 대대적으로 드러났다.[4]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다음 날인 23일, 메이지 천황에게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의 사회주의 대응이 미흡하다고 비판하였다.[4]
4. 2. 내각 총사직
1908년6월 22일적기 사건으로 사회주의 침투가 대대적으로 밝혀졌다. 다음 날인 23일,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 천황에게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이 사회주의에 대해 불충분하게 대응했다고 비판했다. 도쿠다이지 사네토미 시종장(사이온지 수상의 친형)에게서 이 소식을 들은 사이온지 긴모치는 정권 운영에 염증을 느껴 병을 핑계로 사의를 표명했다.[3]하라 다카시 내무대신, 마쓰다 마사히사 법무대신은 직전 선거에서 승리했음을 들어 사이온지를 위로했지만, 7월 4일 내각은 총사직했다.[3]
4. 3. 대한(對韓) 정책의 문제점 (한국의 관점)
사이온지 긴모치일본어 내각은 대한제국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했다.[1] 이는 명백한 주권 침해 행위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조
[1]
웹사이트
First Saionji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06-01-07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06-03-03
[4]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06-05-19
[5]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08-01-14
[6]
문서
1908년(明治41년) 1월 14일부터 1908년(明治41년) 3월 25일까지 대장, 사법상 겸임.
[7]
문서
1907년(明治40년) 9월 21일 서임.
[8]
간행물
『官報』第7272号「敍任及辞令」
1907-09-23
[9]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08-03-25
[10]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06-03-27
[11]
문서
1907년(明治40년) 11월 4일 서임.
[12]
간행물
『官報』第6754号「叙任及辞令」
NDLDC
1906-01-08
[13]
간행물
『官報』第7355号「叙任及辞令」
NDLDC
1908-01-06
[14]
간행물
『官報』第6760号「叙任及辞令」
NDLDC
1906-01-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